대표님과의 대화, 항상 일 얘기뿐이다
- 11 Dec, 2025
대표님과의 대화, 항상 일 얘기뿐이다
신입 때는 달랐다
입사 첫날. 대표님이 커피 한 잔 사주셨다.
“여기선 배울 게 많을 거예요. 같이 성장해요.”
그때는 믿었다. 스타트업이니까 대표랑 가까이서 배우겠지. 멘토십 같은 거 있겠지.
첫 달은 실제로 그랬다. 대표님이 코드 봐주셨다. “이 부분은 이렇게 하면 더 좋아요.” 설명도 해주셨다.
점심 먹으면서 개발 이야기도 했다. “예전에 이런 실수 했어요.” 경험담도 들려주셨다.
나쁘지 않았다.

3개월 후부터
개발자가 나 혼자 된 건 3개월 후였다.
선배 개발자 퇴사. 이유는 안 알려줬다. 그냥 “개인 사정”이래.
그날부터 대표님 태도가 바뀌었다. 아니, 바뀐 게 아니라 여유가 없어진 거다.
“이거 언제까지 되죠?”
“버그 언제 고치죠?”
“고객사에서 요청 들어왔는데요.”
질문만. 답변 요구만. 배려는 없다.
점심도 같이 안 먹게 됐다. 대표님은 회의. 나는 배포.
지금의 대화 패턴
월요일 아침. 슬랙 메시지.
“주말에 고객사에서 문의 들어왔어요. 확인 부탁합니다.”
인사는 없다. “안녕하세요”도 없다. 바로 본론.
나도 답한다. “확인했습니다. 오늘 중 처리하겠습니다.”
똑같이 본론만. 이게 우리 대화의 100%다.
화요일. 긴급 회의 소집.
“이 기능 급한데, 언제 가능해요?”
“이번 주는 힘들고, 다음 주면…”
“고객사가 기다리는데. 주말에 좀…”
거절하면 분위기 이상해진다. 결국 “해보겠습니다”라고 답한다.
회의 끝. 대표님 “수고하세요.” 나 “네.”
이게 전부다.

새벽 2시의 슬랙
제일 황당한 건 새벽 대화다.
새벽 2시 18분. 슬랙 알림.
“서버 응답 느린 것 같은데 확인 가능하세요?”
자고 있었다. 알림음에 깼다.
확인했다. AWS 콘솔 열었다. CPU 사용률 94%.
“확인했습니다. DB 쿼리 최적화 필요합니다. 내일 아침에 작업하겠습니다.”
답장 바로 옴. “네, 감사합니다.”
감사는 개뿔. 나 지금 자야 하는데.
다음 날 아침 10시. 출근.
대표님이 웃으며 “어제 늦게까지 고생하셨어요.”
그게 끝이다. 커피 한 잔 안 사주신다. 보상 휴가 같은 것도 없다.
그냥 “고생하셨어요.” 말만.
내가 기대했던 것
신입 때는 이런 거 배우고 싶었다.
아키텍처 설계. 확장 가능한 시스템. 기술 부채 관리. 팀 빌딩.
대표님이 CTO 출신이라고 들었다. 큰 회사에서 팀 리드 하셨다고.
그런 경험 듣고 싶었다. “이럴 땐 이렇게 했어요.” 그런 조언.
6개월 후 1on1 때 물어봤다.
“리팩토링 시간 좀 가질 수 있을까요? 기술 부채가…”
대표님 대답. “일단 기능 개발이 급해요. 나중에 시간 나면 해요.”
나중은 안 온다. 계속 급한 것만 생긴다.
기술 상담은 커녕 진도 체크만 받는다.

다른 대표들은 어떨까
전 직장 동기 만났다. 걔네 회사는 개발자 15명.
“우리 대표님은 개발 모르세요. 그래서 CTO한테 다 맡기시고, 우리랑은 회식 때나 대화해요.”
부럽다. 차라리 그게 나을 수도.
우리 대표님은 개발 아신다. 그래서 더 문제다.
“이거 왜 이렇게 짰어요?”
“이 방식은 비효율적인데요?”
지적만 하신다. 대안은 안 주신다. “알아서 고쳐보세요.”
멘토가 아니라 QA다. 아니, PM이다.
다른 동기는 대기업 다닌다. 대표는 커녕 임원도 못 봤다고.
“그래도 야근은 안 해요. 시스템이 있으니까.”
우리는 시스템이 없다. 나밖에 없다. 대표님도 아신다. 그래서 더 요구하신다.
일상의 대화들
점심시간. 식당 가는 길.
대표님 “점심 뭐 먹어요?”
나 “아무거나요.”
대표님 “칼국수 어때요?”
나 “좋아요.”
식사 중.
대표님 “그 기능 진행 어때요?”
또 일 얘기다. 밥 먹으면서도.
나 “70% 정도 됐습니다.”
대표님 “이번 주 안에 되죠?”
나 “네, 될 것 같습니다.”
대표님 “좋아요. 고객사가 기다리거든요.”
식사 끝. 각자 사무실 복귀.
사적인 대화 0%. 날씨 얘기도 안 한다. 주말 뭐 했냐고도 안 묻는다.
오로지 프로젝트, 버그, 일정, 고객사.
장애 발생했을 때
제일 많이 대화하는 때가 장애 상황이다.
금요일 오후 4시. 서버 다운.
슬랙에 대표님 메시지 5개 연속.
“서버 안 되는데요”
“고객사에서 연락 왔어요”
“확인 부탁합니다”
“언제쯤 복구 가능하죠”
“급합니다”
전화도 온다. 받는다.
“네, 확인 중입니다.”
“DB 커넥션 이슈인 것 같습니다.”
“10분 안에 복구하겠습니다.”
전화 끊고 작업. 손 떨린다.
8분 후 복구. 슬랙 메시지.
“복구 완료했습니다.”
대표님 답장. “수고하셨어요. 원인 파악해서 공유 부탁합니다.”
원인 분석 2시간 걸렸다. 퇴근 못 했다.
보고서 올렸다. 대표님 읽음. 답장 없음.
다음 날 아침에도 언급 없음. 그냥 넘어감.
칭찬도 없고 위로도 없다. 당연한 일처럼.
1년차 vs 3년차
1년차 때는 기대가 있었다.
“언젠간 여유 생기겠지. 그럼 제대로 된 대화 하겠지.”
2년차 때는 체념했다.
“여기 대표님은 원래 이런가 보다.”
3년차 지금. 습관이 됐다.
대표님 메시지 오면 자동으로 답한다. 감정 없이.
“확인했습니다.”
“진행하겠습니다.”
“내일까지 완료하겠습니다.”
로봇처럼. 기계적으로.
대표님도 마찬가지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확인했습니다.”
우리 사이엔 일밖에 없다. 인간적인 교류는 사라졌다.
아니, 애초에 없었는지도.
다른 스타트업들은
유튜브에서 봤다. 어떤 스타트업 대표 인터뷰.
“직원들과 소통이 제일 중요해요. 매주 1on1 하고, 고민 들어주고…”
부럽다. 우리는 1on1 3개월에 한 번. 그것도 15분.
내용은 똑같다.
“진행 상황 어때요?”
“어려운 점 있어요?”
“없으면 수고하세요.”
끝.
고민 얘기하면 “같이 고민해볼게요”라고 하신다. 근데 그 후 연락 없다.
까먹으신 건지 바쁘신 건지.
결국 나 혼자 해결한다. 항상.
그래도 남은 이유
퇴사 생각 안 해본 건 아니다. 거의 매일 한다.
근데 못 나간다.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나가면 서비스 터진다. 100% 확신한다.
대표님도 아신다. 그래서 더 못 나간다.
“후임 뽑고 인수인계하고 나가세요.”
말은 쉽다. 채용 6개월째 안 된다. 면접 올 사람도 없다.
연봉도 낮고 업무도 많고 혼자 해야 하니까.
그리고 솔직히 대표님 미워할 수가 없다.
나쁜 사람은 아니다. 그냥 바쁜 거다. 여유가 없는 거다.
스타트업이 힘드니까. 투자 받아야 하고 고객사 관리해야 하고.
이해는 한다. 근데 이해와 별개로 나도 힘들다.
바라는 것
크게 바라는 거 아니다.
일주일에 한 번만이라도. 일 얘기 말고 다른 얘기 했으면.
“요즘 어때요?”
“주말 잘 쉬었어요?”
“힘든 거 없어요?”
이런 거. 평범한 거.
아니면 기술 얘기라도. 제대로 된.
“이 부분은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제가 예전에 이런 경험이 있는데…”
“같이 고민해봅시다.”
이런 대화. 성장할 수 있는 대화.
지금은 그냥 지시와 보고다. 상사와 부하. 대표와 직원.
멘토와 멘티는 커녕 동료도 아니다.
결국
어제도 대표님이랑 대화했다.
“이번 주 릴리즈 일정 어때요?”
“목요일 가능합니다.”
“좋아요. 부탁합니다.”
끝.
30초 걸렸다. 이게 우리의 평균 대화 시간이다.
신입 때 기대했던 멘토십. 성장 기회. 배움.
다 착각이었다.
여기선 배우는 게 아니라 쓰이는 거다. 혼자서 다 해내는 거다.
대표님은 멘토가 아니라 클라이언트다. 요구사항 주는 사람.
인정하기 싫지만 이게 현실이다.
언젠가는 나갈 거다. 준비되면.
그때까지는 버틴다. 대화 없이도.
대표님 메시지 또 왔다. “확인 부탁합니다.” 답한다. “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