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검진 결과: 수면 부족, 스트레스, 경고등

건강검진 결과: 수면 부족, 스트레스, 경고등

건강검진 결과: 수면 부족, 스트레스, 경고등

우편으로 온 경고장

건강검진 결과지가 왔다. 우편으로.

회사 소속이니까 단체 검진이다. 작년 11월에 받았는데 이제야 왔다. 왜 이렇게 늦게 오냐고? 우리 회사 인사팀이 없어서다. 대표님이 직접 챙기시는데 바쁘시니까.

봉투 뜯었다. 빨간 글씨가 보인다.

“재검사 권고” “수면의 질 저하” “스트레스 호르몬 수치 상승” “혈압 경계”

28살한테 나올 결과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근데 놀랍지 않다. 알고 있었으니까.

의사 선생님의 말씀

결과지 마지막에 의사 소견이 있다.

“수면시간 확보와 스트레스 관리가 필요합니다. 규칙적인 생활과 충분한 휴식을 권합니다.”

웃었다. 쓴웃음.

규칙적인 생활. 나도 하고 싶다. 근데 장애는 규칙적으로 안 터진다. 새벽 3시에도 터지고 주말 아침 9시에도 터진다.

충분한 휴식. 나도 쉬고 싶다. 근데 내가 안 고치면 아무도 못 고친다. 개발자가 나 혼자니까.

“좀 쉬셔야겠어요”라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 여기서 쉴 수 없으니까.

검진 받을 때도 웃겼다. 11월 목요일 오전 9시 예약이었는데 전날 밤 배포하다가 새벽 4시에 잤다. 5시간 공복 유지하라는데 어차피 안 먹었다. 일하느라.

채혈할 때 간호사가 물었다. “어제 술 드셨어요?”

“아니요. 일했어요.”

“아… 개발자시구나.”

다들 안다. 개발자는 이렇게 산다고.

수면 부족의 기록

수면 시간을 계산해봤다.

지난 2주:

  • 5시간: 3일
  • 6시간: 4일
  • 4시간: 5일
  • 7시간: 2일 (주말)

평균 5.2시간. 권장 수면 시간은 7~8시간이라던데.

잠을 줄이는 게 아니다. 줄어지는 거다.

계획은 항상 12시에 자는 거다. 근데 10시에 ‘이것만 하고’가 시작되면 2시가 된다. 그리고 8시 반에 일어나야 한다. 10시 출근이지만 9시 반에 슬랙 확인해야 하니까.

주말도 마찬가지다. 토요일 아침에 ‘오늘은 쉬어야지’ 생각한다. 근데 11시쯤 슬랙 알림이 온다.

“이거 급한데 오늘 중으로 가능할까요?”

가능하다. 내가 하면. 그래서 한다.

일요일도 비슷하다. 월요일 스프린트 미팅 준비해야 하고, 배포 전에 체크할 것들 있고, 그러다 보면 저녁이다.

침대에서 노트북 켜놓고 자는 날이 많다. 그냥 코드 보다가 기절하는 거다. 알람 5개 맞춰놔도 다 끄고 다시 잔다.

수면의 질은 당연히 안 좋다. 꿈도 일 관련이다. 코드 꿈, 배포 꿈, 장애 꿈. 진짜다.

지난주에는 꿈에서 DB 마이그레이션 하다가 롤백 못 해서 깼다. 심장이 뛰었다. 실제로 롤백 안 된 줄 알고 노트북 켰다. 새벽 4시 반이었다.

스트레스의 일상화

스트레스 수치가 높다고 한다. 놀랍지 않다.

아침에 눈 뜨면 스트레스다. 어제 배포한 거 문제없나, 슬랙에 뭐 올라왔나, 모니터링 알람은 안 왔나.

출근하면 스트레스다. 오늘 할 일이 10개인데 긴급 건이 3개 더 생긴다.

점심 먹으면서도 스트레스다. 슬랙 확인하면서 먹으니까. ‘이거 좀 봐줄래요?’ 메시지 오면 밥 맛이 없다.

오후는 더 심하다. 기획자가 ‘작은 수정’이라고 하는데 백엔드 로직 전체를 뜯어야 한다. 근데 ‘내일까지’라고 한다.

저녁에는 퇴근 못 한다는 스트레스. 9시가 되어도 끝이 안 보인다. 10시 넘어서 나간다.

집 가서도 스트레스다. 노트북 꺼야 하는데 못 끈다. ‘혹시 장애 나면?’ 하는 생각에.

주말 스트레스는 다르다. ‘쉬어야 하는데 쉬는 게 불안하다.’ 이게 제일 웃기다.

스트레스 해소법을 찾아봤다. 운동, 취미, 명상.

운동할 시간이 없다. 퇴근이 10시인데 헬스장은 11시에 닫는다.

취미도 없다. 코딩이 취미였는데 이제는 일이다. 게임 하려고 Steam 키는데 5분 만에 지루해진다. 버그 찾는 게 더 익숙하니까.

명상은 시도했다. 앱 깔아서 5분짜리 했다. 근데 중간에 슬랙 알림 와서 중단했다. 그 뒤로 안 한다.

스트레스가 일상이 되니까 감각이 둔해진다. 이게 스트레스인지 아닌지 구분이 안 된다. 그냥 ‘원래 이렇게 사는 거 아닌가?’ 싶다.

근데 건강검진은 거짓말 안 한다. 수치로 보여준다. “너 스트레스 받고 있어. 많이.”

경고등의 의미

혈압이 경계라고 한다. 수축기 135, 이완기 88.

28살 남자 정상 수치는 120/80 정도래. 나는 벌써 넘었다.

재검사 권고 항목이 5개다:

  1. 혈압 재측정
  2. 수면다원검사
  3. 스트레스 검사
  4. 간기능 재검사 (에너지 드링크 때문인 듯)
  5. 위내시경 (속 쓰림 항목 체크했더니)

재검사 받으러 가야 한다. 근데 언제 가지?

병원 예약하려면 평일 낮에 가야 한다. 근데 낮에는 일한다. 반차 써야 하는데 반차 쓰면 그날 일은 누가 하지?

야간 진료도 있다. 8시까지. 근데 나는 8시에 퇴근 못 한다. 7시에 나가려면 5시부터 마무리해야 하는데 그럴 수 있는 날이 한 달에 하루?

주말 진료는 토요일 오전만 한다. 토요일 오전은 자고 싶다. 평일에 못 잔 잠 보충하는 유일한 시간이니까.

그래서 재검사를 못 간다. 이미 3개월 지났다.

경고등이 켜졌는데 정비소에 갈 시간이 없다. 그냥 계속 운전한다. 언젠가 멈출 때까지.

에너지 드링크로 버티기

커피는 하루 3잔이다. 아침, 점심, 오후.

근데 그걸로 안 된다. 그래서 에너지 드링크를 마신다.

핫식스, 레드불, 몬스터. 다 마셔봤다. 요즘은 편의점 PB 제품. 1000원이라 부담 없다.

하루 2캔 정도. 오후 3시에 하나, 저녁 8시에 하나.

처음에는 효과가 있었다. 머리가 깨고 집중이 됐다. 근데 이제는 안 마시면 머리가 안 돌아간다.

카페인 의존이다. 알고 있다. 근데 끊을 수 없다. 끊으면 일을 못 하니까.

간기능 검사에서 지적받았다. 수치가 조금 높다고. 에너지 드링크랑 불규칙한 식사 때문일 거라고.

의사가 물었다. “에너지 드링크 자주 드세요?”

“네. 하루 2캔요.”

“줄이셔야겠어요. 간에 부담이 갑니다.”

“네…”

근데 안 줄었다. 못 줄인다. 이거 안 마시면 오후 3시부터 멍해진다.

동료들 보면 다들 마신다. 스타트업 개발자들 책상에 에너지 드링크 없는 곳 없다. 이게 이 업계 연료다.

건강에 안 좋은 거 안다. 근데 대안이 없다. 잠을 더 자거나 스트레스를 줄이면 되는데, 그게 안 되니까 이걸 마시는 거다.

속 쓰림의 일상

위내시경 권고를 받았다. 속 쓰림 항목에 체크했더니.

속이 쓰리다. 아침에 일어나면 쓰리고, 점심 먹고 나면 쓰리고, 저녁에도 쓰리다.

공복이어도 쓰리고 식사 후에도 쓰리다. 커피 마시면 더 쓰리다. 근데 커피는 마셔야 한다.

약을 산다. 편의점에서 파는 소화제, 제산제. 가방에 항상 들고 다닌다.

효과는 있다. 30분 정도는. 그다음에 또 쓰리면 또 먹는다.

하루에 3~4번 먹는 것 같다. 식후 30분에 1정이라는데 지키지 못한다. 쓰리면 그냥 먹는다.

왜 쓰린지 안다. 불규칙한 식사, 스트레스, 카페인, 수면 부족. 다 해당된다.

점심을 거르는 날이 많다. 정신없어서. 오후 4시에 ‘아, 점심 안 먹었네’ 하고 과자 먹는다.

저녁은 먹는다. 근데 9시 넘어서. 야식이 저녁이다. 치킨, 피자, 라면. 빨리 먹을 수 있는 것들.

위내시경 예약도 못 했다. 금식해야 하고 진정제 쓰면 보호자 동반이래. 누굴 데려가지? 가족은 지방이고 친구들은 다 일한다.

그래서 또 안 간다. 약으로 버틴다. 언젠가 진짜 문제 생기기 전까지.

쉴 수 없는 이유들

의사 말대로 쉬면 된다. 이론상으로는.

휴가를 쓰면 된다. 연차가 15일 있다. 근데 한 번도 안 썼다.

왜냐하면:

  1. 내가 없으면 개발이 멈춘다 개발자가 나 혼자다. 내가 쉬면 그날은 아무것도 안 된다. 기획자도, 디자이너도, 대표님도 나를 기다린다.

  2. 휴가 가도 일한다 작년에 3일 휴가 냈다. 부모님 뵈러 지방 갔다. 둘째 날 오후에 장애 터졌다. 노트북 안 가져갔다. PC방 가서 고쳤다. 부모님한테 ‘급한 일’이라고 했다.

  3. 돌아와서 더 힘들다 쉬고 나면 일이 쌓인다. 슬랙 메시지 100개, 지라 티켓 20개. 하루 쉬면 이틀 치 일이 생긴다.

  4. 미안하다 스타트업이다. 다들 바쁘다. 나만 쉬면 민폐다. 그런 기분이 든다.

반차도 마찬가지다. 오전 반차 내면 오후에 2배로 일하고, 오후 반차 내면 오전에 미리 다 해놔야 한다. 결국 같다.

재택은 더 웃기다. 재택하면 더 일한다. 출퇴근 시간이 없어지니까 그 시간에도 일한다. 점심시간도 짧게 먹고 일한다.

쉬려면 시스템이 바뀌어야 한다. 개발자를 더 뽑거나, 업무량을 줄이거나, 온콜을 나눠 가지거나.

근데 다 안 된다. 채용 예산 없고, 할 일은 계속 생기고, 나눠 가질 사람이 없다.

그래서 못 쉰다. 아니, 안 쉰다. 쉬면 불안하니까.

주변의 반응들

부모님은 걱정하신다.

“얼굴이 왜 그래? 많이 피곤해 보인다.”

“괜찮아요. 원래 이래요.”

“건강검진은 받았어?”

“네. 괜찮대요.” (거짓말)

친구들은 알고 있다.

“너 진짜 죽겠다.”

“ㅇㅇ.”

“이직 안 해?”

“해야지. 근데…”

“근데?”

“여기 나가면 망할 것 같아서.”

전 직장 동기들은 비교한다.

“나는 요즘 8시 퇴근해. 야근 거의 없어.”

“좋겠다.”

“너네는?”

“비슷해.” (거짓말. 10시 퇴근이다)

대표님은 모르신다. 아니, 아시는데 모른 척하신다.

“너무 무리하지 마. 건강이 최우선이야.”

그러면서 업무는 계속 준다. ‘급한데’, ‘간단한 건데’, ‘오늘만’.

나도 받는다. 거절 못 한다. 거절하면 누가 하지?

버티는 이유

왜 버티나.

돈 때문은 아니다. 4800만원. 많지 않다. 대기업 가면 더 받는다.

경력 때문도 아니다. 3년 차에 풀스택. 이력서는 괜찮다. 이직하면 된다.

책임감 때문이다.

이 서비스를 내가 만들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모든 코드에 내 손이 갔다.

유저가 1만 명이다. 적지 않다. 이 사람들이 매일 쓴다. 내가 만든 걸.

내가 떠나면 누가 유지보수하지? 대표님? 못 하신다. 신입 뽑아도 몇 달은 걸린다.

그동안 서비스는? 터질 거다. 장애 나도 못 고치고, 기능 추가도 못 하고.

그게 싫다. 내가 만든 게 망가지는 거.

그래서 버틴다. 건강검진 결과 보면서도 ‘좀만 더’라고 생각한다.

좀만 더 버티면 채용된다. 좀만 더 버티면 시리즈 A 받는다. 좀만 더 버티면 개발팀이 생긴다.

근데 ‘좀만 더’가 벌써 1년이다.

바뀌지 않는 것들

건강검진 결과를 책상 서랍에 넣었다.

재검사는 안 갈 거다. 시간 없으니까.

수면 시간은 안 늘릴 거다. 일이 있으니까.

스트레스는 안 줄일 거다. 환경이 안 바뀌니까.

에너지 드링크는 계속 마실 거다. 대안이 없으니까.

다 안다. 이렇게 살면 안 된다는 거.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거. 언젠가 문제 생긴다는 거.

근데 지금 당장은 이렇게밖에 못 산다.

의사의 ‘좀 쉬셔야겠어요’라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 여기서 쉴 수 없으니까.

건강검진 결과는 경고다. 빨간 신호등이다.

근데 나는 브레이크 밟을 수 없다. 뒤에 차가 너무 많으니까.

그래서 계속 간다. 다음 신호등까지.

그게 어디인지는 모른다. 그냥 간다.


내년 건강검진에서도 똑같은 결과 나올 것 같다. 아니, 더 나쁠 거다. 근데 뭐 어쩌겠나. 계속 살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