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직장 동기: '너 아직 거기야?' 그 한 마디

전 직장 동기: '너 아직 거기야?' 그 한 마디

카톡이 왔다

전 직장 동기 단톡방에 메시지가 떴다.

“다들 연말 회식 언제야? 우리 것도 12월 20일로 잡혔는데”

누군가 답했다. “우리는 15일. 팀장님이 예약하셨대.”

팀장. 그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에너지 드링크를 마시며 터미널을 봤다. 빌드 에러. 또.

“민준아, 너는?”

이름이 호명됐다. 3초 고민했다.

“우리는 아직. 12명이라 언제든지 가능할 듯ㅋ”

ㅋ을 붙였다. 안 웃긴데.

3년 전 우리는 같았다

신입 동기 5명. 모두 같은 SI 회사 입사.

우리는 똑같이 야근했다. 똑같이 불만 있었다. 똑같이 “여기서 배우고 나가자”고 했다.

2년 차 되자 하나둘 떠났다.

재훈이는 네이버. “이제 좀 숨통 트인다.”

수진이는 카카오. “복지 미쳤어. 진짜.”

동욱이는 삼성전자. “연봉이… 어, 많이 올랐어.”

나도 이력서 넣었다. 면접도 몇 개 봤다.

근데 스타트업 대표가 연락 왔다. “민준씨 포트폴리오 봤는데, 우리 초기 멤버로 어때요?”

스톡옵션 0.5%. “상장하면 억 단위예요.”

그때는 믿었다. 진짜로.

지금 그들은

재훈이 인스타 스토리. 팀 회식 사진. “우리 팀 최고👍”

팀이 있다는 게 부러웠다.

수진이 링크드인 업데이트. “Promoted to Senior Engineer”

3년 만에 시니어. 나는 여전히 주니어도 시니어도 아닌 ‘개발자’.

동욱이는 결혼 준비 중이래. “연봉도 올랐고, 이제 좀 안정됐어.”

안정. 그 단어가 낯설다.

나는? AWS 콘솔 보다가 비용 알림 받고 식겁했다.

“이번 달 $2,300 넘었습니다.”

대표님께 슬랙 보냈다. “AWS 비용 최적화 필요합니다.”

답장. “급한가요? 일단 기능 개발 먼저…”

너 아직 거기야

추석 때 만났다. 동기 5명 중 4명.

재훈이가 물었다. “민준아, 너 그 스타트업 아직 있어?”

“응. 아직.”

“거기 몇 명이라고 했지?”

“12명.”

“아직도 12명이야?”

”…응.”

침묵. 짧았지만 길었다.

수진이가 끼어들었다. “근데 거기 재밌잖아. 네가 다 만드는 거.”

고마웠다. 근데 위로는 아니었다.

동욱이가 말했다. “우리 회사 개발자 채용 중인데, 관심 있으면…”

“아, 괜찮아. 지금 프로젝트 마무리 중이라.”

거짓말이었다. 프로젝트는 언제나 진행 중이다. 마무리는 없다.

집에 와서 맥주 마셨다. 혼자.

‘너 아직 거기야?’

그 말이 계속 맴돌았다.

아직. 그 단어가 칼처럼 박혔다.

우리는 다른 길을 간다

그들은 팀이 있다. 나는 혼자다.

그들은 온보딩 받은 신입을 가르친다. 나는 스택오버플로우가 선배다.

그들은 장애 나면 시스템팀 부른다. 나는 내가 시스템팀이다.

그들은 코드리뷰 받는다. 나는 머지 버튼 누를 때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거 맞나?”

그들은 연차 쓴다. 나는 연차 써도 슬랙 확인한다.

그들은 퇴근한다. 나는 ‘오늘은 일찍’이 10시다.

다른 건 당연하다. 대기업이랑 스타트업은 다르니까.

근데 가끔 생각한다.

‘나는 뭘 얻고 있는 거지?’

그래도 나한테 있는 것

전체 서비스 아키텍처를 안다. 다.

프론트 어디서 API 호출하는지. 백엔드 어떻게 처리하는지. DB 스키마 왜 이렇게 설계했는지.

모른다. 내가 설계했으니까.

장애 나면 10분 안에 원인 찾는다. 로그 어디 찍히는지 다 알아서.

AWS 인프라 구조도 머릿속에 있다. CloudFormation 템플릿 내가 짰으니까.

배포 파이프라인도 내가 만들었다. CI/CD 전부.

이게 3년 치 경험이다.

대기업 동기들은? 레거시 코드 일부만 본다. 담당 모듈만.

“전체 서비스 구조요? 저도 잘…”

팀장한테 물어보래.

나는? 물어볼 사람이 없다. 내가 다 안다. 어쩔 수 없이.

이게 강점이다. 분명히.

근데 왜 자신이 없지?

이력서를 열었다

새벽 2시. 배포 끝났다.

이력서 파일을 열었다. 1년 전 작성한 거.

경력기술서 쓰기 시작했다.

“풀스택 개발자로서 서비스 전체를 담당…”

지웠다. 너무 포괄적이다.

“React, Node.js, PostgreSQL, AWS…”

기술스택만 나열하면 뭐하나.

“사용자 10만 명 규모 서비스 단독 개발 및 운영…”

이건 좀 괜찮다. 근데 증명할 수 있나?

대표님께 추천서 부탁하면? “지금은 안 돼요. 프로젝트 끝나고…”

동료 추천은? 동료가 없는데.

시니어 검증은? 시니어가 없는데.

이력서 창을 닫았다.

모니터에 슬랙 알림. 대표님.

“민준씨, 내일 오전에 급한 기능 하나만…”

“네. 확인했습니다.”

이력서는 다음에.

단톡방 메시지

“민준아 요즘 어때?”

수진이가 물었다.

“응 그냥. 바빠.”

“너 진짜 혼자 다 해? 아직도?”

“ㅇㅇ 곧 개발자 뽑는대.”

6개월째 같은 말.

“너 이직 생각은?”

“있긴 한데, 지금은…”

“지금은?”

“프로젝트 마무리해야 돼서.”

또 같은 핑계.

재훈이가 끼어들었다. “야 근데 솔직히 너 그 회사 떠나면 서비스 터지는 거 아니야?”

”…ㅋㅋ 그럴 수도.”

“그럼 연봉협상 제대로 해야지. 너 없으면 안 되는 거잖아.”

해봤다. 작년에.

“민준씨 지금 급여도 스타트업 치고 적지 않아요.”

적다. 대기업 동기들 연봉 들으면.

“나중에 상장하면…”

나중은 언제인데.

메시지 입력창에 커서만 깜빡였다.

지웠다. 보내지 않았다.

장애가 터졌다

토요일 오후 3시. 친구들이랑 약속 있었다.

슬랙 알림 20개. 전화 5통.

“서비스 안 돼요!”

“결제 오류 나요!”

“DB 연결 끊겼어요!”

옷 입다 말고 노트북 켰다.

로그 확인. DB 커넥션 풀 초과.

쿼리 하나가 테이블 전체를 스캔하고 있었다.

누가 배포했지? 나다. 어제 새벽에.

“30분이면 됩니다.”

친구들한테 카톡. “미안 좀 늦을 것 같아.”

1시간 걸렸다. 쿼리 수정, 배포, 모니터링.

도착했을 때 다들 식사 끝나고 있었다.

“야 미안. 장애가…”

“괜찮아. 근데 너 진짜 힘들겠다.”

힘든 게 아니다.

익숙한 거다. 더 무섭다.

이게 성장인가

대표님이 말했다. “민준씨 정말 많이 성장했어요.”

뭐가 성장했지?

기술스택은 늘었다. React, Vue, Svelte 다 해봤다. 필요하니까.

AWS 서비스도 20개 넘게 만져봤다. 비용 줄이려고.

모니터링 시스템도 구축했다. 장애 빨리 찾으려고.

CI/CD 파이프라인도 3번 갈아엎었다. 배포 시간 줄이려고.

근데 이게 성장인가?

아니면 생존인가?

대기업 동기들은 ‘이번 분기 OKR’을 얘기한다.

나는 ‘오늘 할 일’도 못 끝낸다.

그들은 ‘커리어 패스’를 고민한다.

나는 ‘내일 출근’을 고민한다.

성장과 생존의 경계가 흐릿하다.

링크드인을 켰다

채용 공고가 떴다.

“시니어 백엔드 개발자 모집 - 네이버”

자격요건 봤다.

“5년 이상 경력…”

나는 3년. 탈락.

근데 실무 경험은? 혼자 다 했는데?

“대규모 트래픽 처리 경험…”

우리 서비스 DAU 5만. 대규모는 아니다.

“MSA 아키텍처 설계 및 운영…”

모놀리식이다. 쪼갤 인력이 없어서.

“코드리뷰 및 주니어 멘토링…”

코드리뷰 받아본 적도 없는데 어떻게 하나.

창 닫았다.

내 경험은 독특하다. 깊이는 있는데 폭이 좁다.

아니, 폭은 넓은데 검증이 없다.

시장이 원하는 건 ‘검증된 전문성’.

나한테 있는 건 ‘검증 안 된 올라운더’.

그래도 못 떠난다

이력서 넣을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근데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들.

결제 모듈. 내가 짰다. 나만 안다.

배포 스크립트. 주석도 없다. 나만 돌릴 수 있다.

DB 마이그레이션. 순서 틀리면 터진다. 나만 순서 안다.

모니터링 대시보드. 알람 기준 내가 정했다.

내가 떠나면? 서비스 터진다. 100%.

대표님이 새 개발자 뽑으면? 인수인계 3개월 걸린다. 최소.

그 사이에 장애 나면? 대표님이 고친다고? 불가능.

책임감? 아니다.

죄책감이다.

여기까지 만든 게 나니까.

무너지는 거 보기 싫어서.

그게 날 붙잡는다.

동기 모임에서

연말 모임. 4명 모였다.

재훈이가 말했다. “나 내년에 팀장 달 것 같아.”

“오 축하해.”

수진이도. “나도 승진 심사 들어갔어.”

“대박.”

동욱이는. “우리 팀 신입이 두 명 들어와. 가르치느라 바빠.”

“좋겠다.”

내 차례.

“민준이 너는?”

“나? 음…”

뭐라고 하지.

“연봉 조금 올랐어.”

200만원. 4800에서 5000.

“그래도 혼자 하는 거 힘들지 않아?”

“힘들긴 한데… 뭐.”

말을 흐렸다.

“근데 거기 상장은 언제 해?”

”…모르겠어. 대표님은 내년에 시리즈B 받는다는데.”

작년에도 들었던 말.

“민준아.”

재훈이가 진지하게 말했다.

“너 거기서 배울 건 다 배운 것 같은데.”

배울 건 다 배웠나?

아니다. 아직 모르는 게 많다.

근데 배울 ‘사람’이 없다.

새벽 3시의 생각

배포 끝났다. 모니터링 확인. 정상.

침대에 누웠다.

천장을 봤다.

‘나는 잘하고 있는 걸까?’

3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다.

동기들은 조직 안에서 성장했다.

나는 혼자서 버텼다.

누가 더 나은가?

모르겠다.

확실한 건.

그들은 ‘우리 팀’이라고 말한다.

나는 ‘우리 회사’라고 말한다.

근데 속으론 ‘내 서비스’라고 생각한다.

이게 자부심인가, 집착인가.

경계가 없다.

눈 감았다. 슬랙 알림 소리가 환청처럼 들렸다.

없는데도.

내일도 출근한다

알람. 10시.

일어났다. 샤워하고 커피 내렸다.

노트북 켰다. 슬랙 확인.

대표님 메시지. “민준씨 오늘 회의 있어요. 11시.”

“네.”

터미널 열었다. git pull 쳤다.

어제 내가 푸시한 코드. 나만 본다.

이게 일상이다.

‘너 아직 거기야?’

아직. 아직이다.

언제까지? 모른다.

떠날 수 있나? 아마도.

떠날 건가? …모르겠다.

에너지 드링크 캔 땄다.

오늘도 시작이다.

혼자서.


여전히 원맨밴드다. 근데 이 곡은 나만 연주할 수 있다. 그게 자랑인지 한계인지, 아직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