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버릇 '제가 볼게요': 모든 문제의 흡수 지점이 되어버린 나
- 09 Dec, 2025
입버릇 ‘제가 볼게요’: 모든 문제의 흡수 지점이 되어버린 나
“제가 볼게요.”
오늘도 이 말을 했다. 세 번째다.
아침 10시, “이 버그 어떻게 해야 하나요?” → “제가 볼게요.” 점심 1시, “DB 느린데 최적화 가능한가요?” → “제가 볼게요.” 오후 4시, “결제 모듈 이상한 것 같은데…” → “제가 볼게요.”
이게 언제부터였나. 입사하고 한 달쯤 지났을 때부터였던 것 같다. 처음엔 프론트만 하려고 들어왔다. 그런데 백엔드 개발자가 퇴사했다. 대표가 물었다. “Node.js 할 줄 아시죠?” 할 줄 안다고 했다. 실수였다.

흡수 지점의 탄생
처음엔 나쁘지 않았다.
“이것도 할 줄 아세요?” “네, 해봤습니다.” “저것도 가능하세요?” “해보겠습니다.”
배우는 게 좋았다. 풀스택이라는 타이틀도 괜찮았다. 이력서에 쓸 수 있는 기술 스택이 늘어났다. React, Node.js, PostgreSQL, Redis, Docker, AWS. 뭐든 할 수 있다는 느낌. 개발자로서 성장하는 기분.
그런데 6개월이 지나자 달라졌다.
“이거 누가 해요?” → 나 “저거 담당자가 누구죠?” → 나 “이 문제 아는 사람?” → 나
모든 질문의 끝이 나였다. 프론트 버그도 나, 백엔드 에러도 나, DB 쿼리 최적화도 나, 배포도 나, 모니터링도 나. 심지어 디자인 시안 검토도 “개발자 의견 좀 들어볼까요?” 하면 나였다.
입버릇이 됐다. “제가 볼게요.”
다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다른 개발자가 없으니까. 물어볼 사람이 없으니까. 해결할 사람이 나밖에 없으니까.

‘오늘 중으로’라는 주문
더 문제인 건 다음 말이었다.
“오늘 중으로 될 거예요.”
이것도 입버릇이 됐다. 왜 그랬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바보 같다.
월요일 아침, 대표가 물었다. “이번 주 금요일까지 결제 모듈 붙일 수 있어요?” “네, 될 거예요.”
화요일 점심, 기획자가 물었다. “이 기능 이번 주 안에 나올 수 있나요?” “오늘 중으로 확인해드릴게요.”
수요일 오후, 디자이너가 물었다. “이 UI 수정 언제까지 가능해요?” “내일까지 될 거예요.”
목요일 저녁, 나는 터미널 앞에 앉아 있었다. 해야 할 일 목록을 봤다.
- 결제 모듈 연동 (50% 완료)
- 신규 기능 개발 (30% 완료)
- UI 수정 7건 (0% 완료)
- 기존 버그 수정 3건 (0% 완료)
- API 성능 개선 (계획만)
전부 “될 거예요”라고 말한 것들이었다.
시계를 봤다. 오후 7시. 퇴근 시간은 지났다. 에너지 드링크를 땄다. 두 번째였다. “오늘 중으로” 해야 했다. 내가 그렇게 말했으니까.
새벽 3시에 퇴근했다. 다음 날 11시에 출근했다. 대표가 물었다. “어제 말한 거 됐어요?” “네, 됐습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잠을 안 자면 됐다.

24시간 온콜 시스템
더 심각한 건 따로 있었다.
장애 알림이었다.
새벽 2시, 핸드폰이 울렸다. 슬랙 알림. “서버 응답 없음.” 눈을 떴다. 노트북을 켰다. AWS 콘솔에 접속했다. EC2 인스턴스가 죽어 있었다. 재시작했다. 다시 잤다.
새벽 4시, 또 울렸다. “DB 연결 오류.” 일어났다. RDS를 확인했다. 커넥션 풀이 터졌다. 코드를 수정했다. 배포했다. 알람을 껐다.
아침 7시, 또 울렸다. 이번엔 전화였다. 대표였다. “고객이 결제가 안 된대요.” 침대에서 일어났다. 노트북으로 로그를 확인했다. PG사 API가 타임아웃이었다. 재시도 로직을 추가했다. “지금 됩니다.” 전화를 끊었다.
10시에 출근했다. 대표가 웃으며 말했다. “고생했어요. 오늘은 일찍 퇴근하세요.”
일찍 퇴근이 뭔지 몰랐다. 7시에 나갔다. 집에 도착했다. 9시였다. 씻고 침대에 누웠다.
10시에 슬랙이 울렸다. “급한 건데요, 내일 아침까지 이거 가능한가요?”
노트북을 다시 켰다.
혼자라는 것의 무게
문제는 간단했다. 나 말고 없었다.
코드리뷰를 해줄 사람이 없었다. 내 코드가 맞는지 틀린지 몰랐다. 스택오버플로우만 믿었다. GPT한테 물어봤다. 그래도 확신이 없었다.
페어 프로그래밍을 할 사람이 없었다. 막히면 혼자 끙끙댔다. 3시간 동안 버그를 찾았다. 오타였다. 누군가 옆에서 봤으면 5분이면 찾았을 것이다.
휴가를 갈 수 없었다. 작년에 3일 휴가를 냈다. 이틀째 되는 날 전화가 왔다. “서버가 안 되는데요.” 휴가지에서 노트북을 켰다. 나머지 하루는 호텔에서 코딩했다.
백업이 없었다. 내가 아프면? 내가 사고 나면? 서비스가 터진다. 그 생각에 병원도 못 갔다. 작년에 독감 걸렸을 때도 재택으로 일했다. 38도 열이 나는데 코드를 짰다.
이게 맞나 싶었다.
채용 공고의 빈자리
6개월 전부터 채용 공고를 냈다.
“주니어 개발자 채용” “경력 1년 이상” “풀스택 환영”
지원자는 많았다. 면접을 봤다. 문제는 내가 면접을 봐야 한다는 거였다.
화요일 오후 2시, 면접 일정이 잡혔다. 오전에 급한 버그가 터졌다. 고객사 데모가 3시였다. 면접을 미뤘다.
목요일 오후 4시, 다시 잡았다. 오후 1시에 서버 장애가 났다. 원인을 찾는데 3시간 걸렸다. 면접 시간에 장애를 해결하고 있었다. 지원자한테 사과 메일을 보냈다.
다음 주 월요일, 세 번째 시도. 이번엔 면접을 봤다. 30분 동안 기술 질문을 했다. “우리 서비스는요…” 설명하다가 슬랙이 울렸다. “급한 건데요.” 면접 중간에 노트북을 켰다.
그 지원자는 합격 통보를 거절했다.
당연했다. 나라도 안 왔을 것이다.
지금까지 15명을 면접 봤다. 합격 통보를 한 사람이 4명. 실제로 입사한 사람은 0명이었다. “연봉 조건이 안 맞아요”, “업무 범위가 너무 넓어요”, “다른 곳으로 결정했습니다.”
다 이해했다. 여기 오면 나처럼 된다. 누가 오겠나.
기술 부채라는 시한폭탄
코드를 볼 때마다 한숨이 나왔다.
6개월 전에 짠 코드였다. 주석이 없었다. 변수명이 ‘temp’, ‘data’, ‘result’였다. 뭐 하는 코드인지 몰랐다. 내가 짠 코드인데.
급하게 짠 코드들이었다. “오늘 중으로”를 지키려고 막 짰다. 테스트 코드? 없었다. 리팩토링? 시간이 없었다. 일단 돌아가게만 만들었다.
그게 쌓였다.
이제는 새 기능을 추가할 때마다 무서웠다. 어디가 터질지 몰랐다. A를 수정하면 B가 깨졌다. B를 고치면 C가 망가졌다. 스파게티 코드의 정석이었다.
리팩토링을 하고 싶었다. 주말에 시도했다. 토요일 오전 10시부터 시작했다. 오후 3시에 슬랙이 울렸다. “고객사 데모 준비 됐나요?” 월요일이었다. 준비 안 됐다고 말할 수 없었다. 리팩토링을 멈췄다. 데모 준비를 했다.
일요일 저녁에 다시 시도했다. 밤 11시에 장애 알림이 왔다. 리팩토링하다가 뭔가 건드린 것 같았다. 롤백했다. 리팩토링 브랜치를 지웠다.
기술 부채는 계속 쌓였다. 언젠가 터질 것이다. 그때 나는 여기 있을까.
책임감이라는 올가미
이직을 생각했다. 여러 번.
작년 9월, 채용 공고를 봤다. “시니어 백엔드 개발자”, “연봉 7000만원~”, “워라밸 보장”. 이력서를 썼다. 저장만 하고 보내지 않았다.
12월, 다시 봤다. “풀스택 개발자”, “스타트업 경험자 우대”. 이력서를 업데이트했다. 이번에도 안 보냈다.
올해 2월, 친구가 연락 왔다. “우리 회사 오면 어때?” 조건이 좋았다. 연봉도 오르고 팀도 있다. 고민했다. 거절했다.
왜? 책임감 때문이었다.
내가 떠나면 서비스가 터진다. 진짜로. 코드를 아는 사람이 나밖에 없다. 인수인계? 누구한테? 신입이 오면? 그 사람이 적응할 때까지 몇 개월이 걸린다. 그동안 누가 서비스를 유지하나.
대표한테 미안했다. 믿고 맡겼는데. 회사가 어려운 거 알았다. 직원이 12명밖에 안 됐다. 투자 유치도 힘들다고 했다. 개발자 연봉을 올려줄 여유가 없었다.
동료들한테도 미안했다. 내가 떠나면 그들도 힘들어진다. 기획자는 개발 일정을 못 잡는다. 디자이너는 구현 가능한지 물어볼 사람이 없다. 마케터는 기능 개발을 못 한다.
고객한테도 미안했다. 서비스를 쓰는 사람들이 있었다. 많지는 않았다. 그래도 매일 쓰는 사람들이었다. 내가 떠나면 그들은?
그래서 못 떠났다. 책임감이 올가미가 됐다.
마지못한 ‘제가 볼게요’
요즘은 이 말을 할 때 감정이 없다.
“제가 볼게요.”
자동으로 나왔다. 반사 작용이었다. 생각하지 않고 말했다. 어차피 내가 봐야 했다.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오늘 오후, 기획자가 물었다. “이 버그 급한데, 오늘 중으로 될까요?”
“제가 볼게요.”
3초도 안 걸렸다. 무슨 버그인지도 안 봤다. 일단 받았다. 어차피 해야 할 것이다.
저녁, 대표가 물었다. “내일 미팅에서 데모 보여줘야 하는데, 이 기능 추가 가능해요?”
“오늘 중으로 될 거예요.”
시계를 안 봤다. 오후 6시였다. 퇴근 시간이었다. 그래도 말했다. “될 거예요.” 습관이었다.
밤 11시, 아직 회사였다. 기능을 추가하고 있었다. 테스트를 돌렸다. 버그가 나왔다. 고쳤다. 또 버그가 나왔다. 고쳤다.
새벽 2시, 집에 왔다. 내일 아침 미팅이 9시였다. 6시간 자면 됐다. 괜찮았다. 어제도 그랬다.
에너지 드링크를 마셨다. 오늘 네 번째였다.
“제가 볼게요.” 오늘도 다섯 번 말했다. 내일은 몇 번 말하게 될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