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owing Posts From
슬랙
- 03 Dec, 2025
기획서가 없다: 슬랙 메시지로 시작되는 개발의 악순환
기획서가 없다: 슬랙 메시지로 시작되는 개발의 악순환 오전 10시 23분, 슬랙 알림 출근했다. 커피 마시려는데 슬랙이 울린다. "@정민 님, 유저들이 검색 기능이 불편하다는 피드백이 있어요. 개선 가능할까요?" 가능하냐고? 당연히 가능하지. 근데 뭘 어떻게 개선하라는 건지 모르겠다. "어떤 부분이 불편한 건가요?" "음... 그냥 전반적으로요. 네이버처럼 자동완성도 있으면 좋을 것 같고요." 네이버. 개발자 4000명 있는 곳이랑 비교하는구나. "자동완성 추가하려면 검색어 로그 수집, 인덱싱, API 구축 필요한데 일정이..." "급한 건 아니에요! 다음 주까지만요 ^^" 다음 주. 오늘이 금요일인데.기획서는 없고, 레퍼런스는 넘친다 점심 먹고 왔다. 슬랙 메시지 12개. 전부 "참고 이미지" 링크다. 당근마켓, 토스, 배민, 무신사, 에어비앤비. "이런 느낌이면 좋겠어요!" 느낌. 개발을 느낌으로 하나. 피그마 열었다. 기획 문서는 없다. 화면 정의서도 없다. 요구사항 정리서도 없다. 있는 건 슬랙 대화 히스토리 347개. 스크롤 올리면서 정리했다.검색창 위치 변경 (3주 전 대화) 필터 기능 추가 (2주 전 대화) 실시간 검색어 순위 (어제 대화) 음성 검색 (오늘 새벽 2시 대화, 누가 새벽에)요구사항 4개. 우선순위는 모른다. 다 "급해요". 노션에 정리했다. 제목: "검색 기능 개선 (추정)". 추정이라고 쓴 이유는 내가 추측한 거라서. 대표님한테 공유했다. "정민님이 정리를 잘하시네요!" 내가 기획자냐.디자인 없으면 내가 한다 요구사항 정리했다. 이제 디자인이다. 우리 디자이너? 퇴사했다. 3개월 전에. 채용 중이다. 6개월째. "정민님, 프론트 하시니까 UI는 대충 넣어주세요. 나중에 디자이너 오면 수정하면 되죠." 대충. 나중에. 개발자가 제일 듣기 싫은 단어 2개. 피그마 열었다. 디자인 시스템? 없다. 컬러 팔레트? 없다. 폰트 가이드? 없다. 기존 화면 캡처해서 색깔 추출했다. #3B82F6, #10B981, #F59E0B. 파란색, 초록색, 주황색. 통일성은 없어 보이지만 뭐. 버튼 디자인했다. 라운드는 8px. 왜 8px? 다른 버튼들이 8px이니까. 검색창 디자인했다. 높이는 48px. 왜 48px? 48이 예쁘니까. 아이콘? 구글에서 무료 아이콘 찾았다. "free search icon png". 라이선스 확인? 나중에. 2시간 걸렸다. 디자이너는 이런 거 하루 종일 하는구나. 대표님한테 공유했다. "오 괜찮은데요? 디자이너 안 뽑아도 되겠어요 ㅋㅋ" 농담이겠지. 농담이라고 해줘.개발 시작, 그리고 변경사항 디자인 끝. 이제 개발이다. 프론트부터. React 컴포넌트 만들었다. SearchBar, AutoComplete, FilterModal. API 설계했다. GET /search?query=. POST /search/log. 로그는 나중에 분석용. 백엔드 작업. Node.js, Express. 라우터 만들고, 컨트롤러 만들고, 서비스 로직 만들고. PostgreSQL 테이블 설계. search_logs, search_keywords, search_rankings. 인덱스 추가. query 컬럼에 GIN 인덱스. 한글 검색 성능 개선용. 작업 중이다. 집중하고 있다. 슬랙 알림. "정민님, 검색 결과를 카드 형태로 보여줄 수 있을까요? 리스트보다 이쁠 것 같아요." ...지금? "지금 리스트 형태로 개발 중인데, 카드로 바꾸면 레이아웃 전체를..." "아 그럼 리스트요! 괜찮아요 ^^" 10분 뒤. "역시 카드가 나을 것 같아요. 요즘 트렌드가 카드잖아요." 카드로 바꿨다. 컴포넌트 3개 수정. CSS 전부 다시. 30분 뒤. "리스트가 정보 한눈에 보기 좋네요. 리스트로 할까요?" 노트북 덮고 싶다. "둘 다 만들어서 대표님이 선택하시죠." 결국 둘 다 만들었다. 토글 버튼도 만들었다. 개발 시간 2배. 테스트는 프로덕션에서 새벽 2시. 배포 준비 끝났다. 테스트 서버? 없다. 예산 부족. AWS 인스턴스 하나로 운영 중. 로컬에서 테스트했다. 문제없다. 내 로컬에선. 배포했다. Docker 이미지 빌드. ECR 푸시. ECS 업데이트. 5분 뒤. 슬랙 알림. 대표님: "검색이 안 돼요." 심장 멈췄다. 로그 확인. DB 커넥션 에러. 동시접속 제한 초과. 로컬에선 유저 1명. 프로덕션은 유저 200명. 커넥션 풀 설정 수정. 긴급 핫픽스. 재배포. 10분 뒤. 정상화. 대표님: "고생하셨어요! 내일 점심 제가 쏠게요 ^^" 점심. 8000원. 내 2시간 = 8000원. 기획서 없는 개발의 대가 월요일. 주간회의. "검색 기능 잘 나왔어요! 근데 필터가 좀 복잡하다는 피드백이..." 또 시작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이 복잡한가요?" "음... 그냥 전체적으로요. 좀 더 직관적이면 좋겠어요." 직관적. 추상적인 단어 1위. "레퍼런스 있으세요?" "쿠팡이요! 쿠팡처럼요." 쿠팡. 개발자 2000명. 지난 3일간 작업 내역:기획 추정: 4시간 디자인: 2시간 프론트 개발: 8시간 백엔드 개발: 6시간 DB 작업: 3시간 배포 및 핫픽스: 2시간 총 25시간문서화된 것:없음다음에 누가 수정하면? 슬랙 히스토리 뒤져야 함. 왜 이렇게 만들었는지 아무도 모름. 기술 부채 +1. 악순환의 시작 기획서 없는 개발. 한 번 시작하면 끝이 없다. 요구사항이 명확하지 않으니 개발자가 추측한다. 추측이니 틀릴 수 있다. 틀리면 다시 만든다. 디자인 없으니 개발자가 만든다. 일관성 없다. 나중에 디자이너 오면 전부 다시. 테스트 환경 없으니 프로덕션이 테스트다. 장애 난다. 유저가 테스터. 문서 없으니 인수인계 불가능. 채용해도 온보딩 불가능. 결국 혼자. "정민님이 다 아시잖아요." 라는 말이 가장 무섭다. 내가 모든 걸 알아야 하는 구조. 내가 없으면 돌아가지 않는 구조. 휴가? 불가능. 퇴사? 미안함. 기획자한테 말했다. "기획서 좀 써주세요." "네! 다음부터요!" 다음은 오지 않는다. 급한 게 먼저니까. 오늘도 슬랙이 운다 오후 5시. 퇴근 1시간 전. 슬랙 알림. "@정민 님, 결제 페이지 UI 좀 바꿔주실 수 있나요? 급해요." 기획서? 없다. 디자인? 없다.요구사항? "그냥 이쁘게요." 노트북 열었다. 피그마 열었다. VSCode 열었다. 에너지 드링크 땄다. 세 번째. 입버릇처럼 말했다. "제가 볼게요." 내일도 모레도. 슬랙 메시지로 시작되는 개발. 기획서는 오늘도 없다.결국 내가 기획자고, 디자이너고, 개발자다. 그리고 테스터. 풀스택이 아니라 풀포지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