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자의 요청이 기획서가 아닐 때: 개발자가 기획자가 된다
- 05 Jan, 2026
기획자의 요청이 기획서가 아닐 때: 개발자가 기획자가 된다
오늘도 슬랙이 울렸다
오전 10시 37분. 슬랙 알림.
“OOO님, 로그인 화면에 소셜 로그인 추가해주세요~ 급해요!”
기획서? 없다. 화면 설계? 없다. 어떤 소셜? 모른다.
이게 3년차 개발자의 일상이다.

기획이 아니라 ‘아이디어’를 받는다
처음엔 물었다. “자세한 기획서 있나요?”
돌아오는 답: “아 그냥 카카오톡처럼요!”
카카오톡처럼. 네이버처럼. 쿠팡처럼.
그게 얼마나 복잡한지 아는가. 모른다. 그래서 나한테 물어본다.
결국 내가 묻는다:
- 어떤 소셜 로그인? (구글, 카카오, 네이버, 애플?)
- 기존 계정이랑 연동은? (이메일 중복이면?)
- 프로필 정보는 어디까지? (이름만? 프사도?)
- 약관 동의는? (필수, 선택 구분은?)
- 에러 처리는? (소셜 연동 실패하면?)
이게 개발자 질문인가, 기획자 질문인가.

대답을 듣고 나서도 기획은 없다
대답은 온다. 하지만 여전히 애매하다.
“일단 카카오, 구글만! 나머지는 나중에요.”
나중에. 이 단어가 제일 무섭다.
“연동은… 음, 이메일 같으면 하나로 합쳐주세요!”
합쳐주세요. 어떻게? 자동으로? 확인하고? 덮어쓰기? 병합?
결국 내가 정한다. 기획서를 내가 쓴다.
노션 켜서:
- 사용자 플로우 그린다
- 예외 케이스 정리한다
- UI 와이어프레임 그린다 (Figma까지 켠다)
- API 스펙 설계한다
- DB 스키마 수정안 작성한다
이거 다 하고 나면 2시간. 개발은 아직 한 줄도 안 했다.
결국 내가 PM이 된다
기획자에게 보낸다. “이렇게 하면 될까요?”
답: “오 좋아요! 그렇게 해주세요~”
…내가 물어본 건데 내가 답을 정했다.
이게 반복되면 학습한다. 아예 안 물어본다.
요청 오면:
- 내가 바로 기획 완성
- 30분 안에 간단히 검증
- 바로 개발 시작
더 빠르다. 커뮤니케이션 비용이 사라진다.
그런데 문제가 생긴다.

책임은 개발자가 진다
기능 출시 후 2일.
“아 이거 왜 이렇게 했어요? 이메일 덮어쓰기는 좀…”
내가 정했는데 내가 혼난다.
“기획서에 없었잖아요.” 이 말이 안 먹힌다.
왜냐면 애초에 기획서가 없었으니까.
“그럼 물어보지 그랬어요.”
물어봤다. 답이 애매했다. 그래서 내가 정했다.
이 과정을 설명하면 “아 그래도…” 로 끝난다.
결국: 기획자가 한 건 아이디어. 나머지는 다 내가 했다.
그런데 책임은 50:50이 아니다. 코드 짠 사람이 진다.
개발 시간은 누가 보상하나
기획하는 데 2시간. 개발하는 데 3시간.
총 5시간짜리 작업.
그런데 산정은? “개발 3시간이면 되죠?”
기획 시간은 안 쳐준다. 왜? 원래 기획자 일이니까.
그럼 나는 뭐지. 개발자인데 기획도 하는 사람.
풀스택의 의미가 확장된다:
- 프론트 + 백엔드 (여기까진 예상함)
- DevOps (그래 이것도 인정)
- 디자인 (Figma 쓸 줄 알게 됨)
- 기획 (이건 예상 못 함)
- QA (테스트도 나)
- CS (장애 대응도 나)
이게 연봉 4800에 스톡옵션 0.5%로 해결되는가.
그래서 기획 실력이 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기획을 잘하게 됐다.
사용자 플로우가 보인다. 예외 케이스가 보인다.
“이렇게 하면 나중에 이런 문제 생긴다”가 보인다.
실제로 기획자보다 더 디테일하게 기획한다.
왜냐면:
- 직접 구현할 사람이니까
- 장애 터지면 내가 고칠 거니까
- 나중에 수정하면 내가 할 거니까
이게 장점인가 단점인가.
이력서에 쓸 수 있다: “기획부터 배포까지 전 과정 경험”
실제 의미: “혼자 다 했다”
경계가 사라진다
어느 순간부터 역할 구분이 없다.
회의에서:
- “이 기능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 나한테 물어봄
- “이 화면 배치 괜찮을까요?” → 나한테 물어봄
- “이 데이터 어떻게 보여줄까요?” → 나한테 물어봄
대표님은 좋아한다. “역시 풀스택!”
기획자는 편해한다. 나한테 물어보면 되니까.
나는? 피곤하다.
개발만 하고 싶은데 기획 회의에 2시간.
기획만 하면 되나? 아니다. 개발도 해야 한다.
결국 둘 다 한다. 시간은 그대로다.
기획자는 정말 필요 없는가
가끔 생각한다. 기획자 없어도 되는 거 아닌가.
어차피 내가 다 하는데.
그런데 아니다. 기획자는 필요하다.
제대로 된 기획자면:
- 시장 조사한다
- 경쟁사 분석한다
- 사용자 인터뷰한다
- 데이터 분석한다
- 우선순위 정한다
- 로드맵 그린다
나는 이거 못 한다. 시간도 없고 역량도 없다.
문제는 “제대로 된 기획자”가 없다는 것.
12명 스타트업에서 기획자는 ‘주니어 1명’.
그 사람도 처음이라 헤맨다. 나한테 물어본다.
결국 내가 알려준다. 기획하는 법을.
이게 맞나 싶다.
이직할 때 뭐라고 쓰지
이력서 쓸 때마다 고민이다.
“기획부터 개발, 배포, 운영까지 전체 프로세스 담당”
멋있게 들린다. 실제로는 “혼자 다 함”.
면접에서 물어본다: “가장 어려웠던 점은?”
솔직하게 말한다: “명확한 기획 없이 개발하는 것”
그럼 또 묻는다: “그럼 어떻게 해결했나요?”
“제가 기획했습니다.”
이게 플러스인가 마이너스인가. 모르겠다.
어떤 회사는 좋아한다: “주도적이네요!”
어떤 회사는 걱정한다: “프로세스 없는 곳이었나보네요.”
둘 다 맞다.
결국 나는 무엇인가
3년차 풀스택 개발자.
이력:
- React, Node.js, PostgreSQL, AWS
- Figma, Notion, 기획 문서 작성
- 프로젝트 매니징, 우선순위 조정
- 사용자 플로우 설계, 와이어프레임
- DB 설계, API 설계
- 프론트 개발, 백엔드 개발
- 배포, 모니터링, 장애 대응
- CS, 버그 수정
이게 한 사람이 할 일인가.
명함에는 “Developer”라고 써있다.
실제로는 “Developer + PM + Designer + DevOps + QA”
연봉은 Developer 하나 값.
이게 스타트업이다. 이게 1인 개발자의 현실이다.
그래도 배우긴 했다
긍정적으로 보면:
기획 능력 생겼다. 이제 Product Sense가 있다.
사용자 관점에서 생각한다. “이거 쓰기 불편한데?” 가 보인다.
기술 선택할 때도 다르다. “이 기술이 좋다”가 아니라 “이 문제에 이 기술이 맞다”.
전체를 본다. 부분이 아니라 흐름을.
이게 시니어 개발자로 가는 길인가? 모르겠다.
확실한 건: 이제 기획서 없어도 개발한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다.
언제까지 이럴 건가
채용 공고 올린 지 6개월.
“주니어 개발자 구합니다”
지원 없다. 면접 본 사람 2명. 안 뽑았다.
이유: “같이 일할 사람 없어서”
나밖에 없으니까 코드 리뷰 해줄 사람 없다.
가르쳐줄 시간도 없다. 기획도 해야 하고 개발도 해야 하는데.
결국 안 뽑는다. 나 혼자 한다.
이게 계속될수록 떠나기 어려워진다.
내가 없으면 서비스 터진다. 기획도 개발도 다 멈춘다.
책임감이 족쇄가 된다.
대안은 있는가
생각해봤다. 몇 가지 선택지:
-
계속 한다
- 장점: 안정적 (?)
- 단점: 번아웃
-
이직한다
- 장점: 제대로 된 프로세스 경험
- 단점: 여기 서비스는?
-
프로세스 바꾼다
- 장점: 근본 해결
- 단점: 안 바뀜 (시도해봄)
현실은 1번. 계속한다.
왜? 떠나기 미안해서.
이게 맞나 싶다. 내 커리어인데.
다음 회사에서는
다짐한다. 다음 회사는:
- 기획서 있는 곳
- 코드 리뷰 되는 곳
- 온콜 로테이션 도는 곳
- 개발자가 2명 이상인 곳
최소한의 기준이다. 이게 사치인가.
이력서에 쓴다: “명확한 요구사항 정의와 협업 프로세스가 있는 환경을 선호합니다”
번역하면: “제발 기획서 좀 주세요”
그래도 남는 것
3년 동안:
기획 문서 87개 작성했다. 내가.
와이어프레임 120개 그렸다. Figma로.
사용자 플로우 42개 설계했다.
이게 개발자 포트폴리오에 들어가나? 모르겠다.
그래도 배웠다:
- 문제를 정의하는 법
- 솔루션을 설계하는 법
- 우선순위를 정하는 법
- 커뮤니케이션하는 법 (혼자지만)
이게 쓸모있을까. 아마도.
다음 회사에서는 “기획 잘 아는 개발자”가 될 것이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나중에 알겠지.
결국 나는 개발자다. 기획도 하는 개발자. 선택이 아니라 생존이었다.
